지진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류의 기억과 해석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글은 ‘기억 방식’과 ‘해석 도구’라는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대 사회가 지진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전승했는지 살펴봅니다. 기록은 문자만이 아니었고, 해석은 과학만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흔들림은 이야기로, 구조물로, 전통으로 남아 문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고대의 지진 기록은 어떻게 전해졌는가
지진은 가장 오래된 자연 현상 중 하나입니다. 인류가 문자를 갖기 훨씬 전부터, 땅은 흔들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고대 사회는 지금처럼 지진을 수치로 측정하거나 지도에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 거대한 변동을 인식하고, 설명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진은 단순한 재난을 넘어, 기억과 문화, 그리고 지식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지진의 기억은 처음에는 말로 전해졌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이야기, 특정 장소나 구조물에 얽힌 신화, 정해진 형식으로 전승되는 구술 시가 속에 지진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단지 ‘언제’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왜’ 일어났는가, ‘무엇을 의미했는가’가 핵심이었습니다. 이 기억 방식은 후에 문자가 도입되면서 점차 기록으로 정착했지만, 그 원형은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지진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던 지역일수록 이러한 기억은 더욱 체계화되었고, 전통과 율법, 건축양식, 주거 패턴 속에 침투했습니다. 예컨대 지진 이후 재건된 마을의 배치 방식, 특정 축일에 반복되는 제사 의식, 안전한 지대에 대한 선민의식 같은 사회적 구조는 지진에 대한 집단 기억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글은 ‘기억 방식’과 ‘해석 도구’라는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대 사회가 지진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미래를 준비했는지를 살펴봅니다. 기록이란 단지 종이에 쓰인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 새겨진 것이기도 했습니다.
기억 방식은 어떻게 공동체의 형태를 바꿨는가
고대 사회는 지진을 정확히 예측하거나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기억은 생존의 도구였고, 집단 지식의 토대였습니다. 구술 전통은 이 기억을 가장 넓게, 가장 오래 전했습니다. 노래, 신화, 제사, 동화 같은 형식은 단순한 오락이나 종교가 아니라, 재난의 흔적을 언어로 보존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의 신토 전통에서는 지진을 일으키는 신적 존재로 ‘나마즈’라는 거대한 메기를 상정했고,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구조물 설계, 도시 설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일부 지역의 민속에는 특정 신의 분노가 땅을 흔든다는 서사가 등장하며, 이 이야기는 특정한 지형에서의 건축 제한, 재건축 주기 등 실제 생활 규범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에서도 지진은 단지 자연재해가 아니라 신의 경고나 정치적 변화의 전조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은 사회 구성원에게 반복적인 해석틀을 제공하며, 지진이 일어난 이유를 단순히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그 기억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경험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왜 그때 지진이 났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혹은 ‘어떻게 다시 재건할 것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기억은 물리적 구조에도 새겨졌습니다. 지진이 반복된 지역에서는 구조물의 배치가 바뀌고, 기초가 강화되며, 일정한 재료가 선택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라, 기억이 구조를 바꾸는 방식이었습니다. 집단적으로 체험한 흔들림은 건축의 철학이 되었고, 생존의 패턴이 되었습니다. 기억 방식은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공동체 전체의 생활양식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 노래했고, 제사를 지냈으며,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고대의 지진 기록은 문자 이전에도 이미 문화로 새겨져 있었고,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형태를 바꾸는 힘이었습니다.
해석 도구는 왜 과학보다 상징에 가까웠을까
지진의 해석은 지금처럼 지진계를 통한 수치 분석이나 지구물리학적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사회가 사용했던 해석 도구는 상징, 종교, 자연 관찰, 체험의 반복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인 해석 체계였습니다. 특히 예측 불가능하고 큰 피해를 주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로서, 상징은 놀라울 만큼 강력한 도구였습니다. 중앙아메리카 마야 문명에서는 지진이 특정 주기의 반복 속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 주기는 달의 궤도, 별의 배열, 제례 캘린더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정기적인 사회 행사, 건축 시기 조절, 인구 분산 정책 등에 반영되었습니다. 예컨대 지진이 잦았던 해에는 건설보다 농경에 집중하고, 사람들을 분산 배치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식의 대응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는 지진을 일종의 ‘징조’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었고, 이는 왕권의 정당성을 검증하거나, 전쟁이나 전염병과 같은 다른 사건과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때 지진은 그 자체로 위험한 현상이 아니라, 다른 사건의 전조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사회 전체의 행동 양식을 조정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해석 도구로서의 신화도 중요했습니다. 신화는 기억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틀을 제공합니다. 지진을 특정 신의 분노나 세계의 균형 붕괴로 설명하는 이야기는 단지 종교적 설명이 아니라, 행동의 기준과 윤리의 방향을 제공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포세이돈은 바다와 지진을 동시에 다스리는 신이었고, 이 신에 대한 예배는 단순히 신앙을 넘어서, 공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집단적 장치였습니다. 해석 도구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합리적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상징과 신화, 반복되는 서사는 공동체가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 대응하는 집단적 방어 체계였고, 이는 오늘날의 조기 경보 시스템 못지않은 사회적 대응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결국 고대 사회의 해석 도구는 과학이 아니었지만, 의미의 질서였습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다시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구조였고, 지금 우리가 가진 분석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은 기억의 장치였습니다.
흔들림은 사료보다 오래 남았다
고대의 지진은 단지 흔들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억의 출발점이었고, 해석의 이유였으며, 공동체의 구조를 재편하는 계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정확히 언제, 몇 도의 강진이 있었는지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 흔들림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노래로, 구조로, 신화로 남았습니다. 기억 방식은 공동체의 감각을 바꾸었습니다. 지진은 반복되었고, 그 반복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신화는 해석이 되었고, 해석은 제도가 되었으며, 제도는 구조로 남았습니다. 해석 도구는 신화와 상징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행동의 기준이자 대응의 전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치를 가지고 지진을 설명하지만, 고대 사회는 상징으로 그것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그 상징은 지금까지도 이야기로, 전통으로, 건축 양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과학은 분석으로, 문화는 기억으로 지진을 기록해 왔고, 그 두 가지 방식은 지금도 병존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진의 기록은 책 보다 더 오래된 구조에 남아 있었습니다. 흔들림은 말이 없지만, 말보다 더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서, 잊지 않는 방식으로 문명을 이어왔습니다.